우리 나라의 민족고전《무예도보통지》가 주체106(2017)년 10월30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데 이어 천문도인 《혼천전도》가 주체112(2023)년 5월2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였다.
고려시기에 쓰던 활에는 동궁, 장엄궁, 세궁, 각궁 등이 있었고 화살에는 세전, 류엽전, 대우전, 편전, 죽전, 철전 등이 있었다.
각궁은 뽕나무를 기본으로 하여 소뿔, 소힘줄 등을 써서 만든것이고 류엽전은 버드나무가지로 만든 화살대에 버들잎모양의 화살촉을 박은것인데 각궁에 걸어서 쏘면 120보까지 나갔고 명중률이 아주 높았다.
고려의 화살은 그후 점차 더 커지고 위력이 세졌는데 12세기초부터는 화살에 화약통이 달리게 됨으로써 보다 위력한 불화살로 발전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전국적범위에서 통일적인 금속화페가 류통되게 된것은 상품화페관계발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로서 상품생산과 류통, 상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금속화페류통의 력사는 매우 오래다.
이미 우리 나라 고대국가들에서 금속화페가 류통되였으며 그후 세나라시기에도 금속화페가 류통되고있었다.
그러나 당시 금속화페의 류통은 부분적인것에 지나지 않았고 쌀이나 천과 같이 현물화페가 기본화페형태로 되여있었다.
그러던것이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금속화페가 점차 현물화페를 구축하고 전국적범위에서 류통되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전국적으로 류통된 금속화페는 상평통보인데 동으로 만든 금속주화였다.
《상평통보》라는 이름은 조선봉건정부의 중앙관청의 하나인 상평청에서 주조한데로부터 나왔다. 흔히 엽전이라고 하였다.
상평통보 1잎을 1문 또는 1푼이라고 하였으며 10잎은 1돈(전), 100잎을 1량이라고 하였다.
보통 100잎(1량)을 한줄에 꿰였는데 이것을 1민이라고 하였으며 10량의 엽전(1 000잎)을 1관이라고 하였다.
금속화페류통이 확대발전하는데 따라 착취계급의 치부욕은 더욱 증대되였다.
이에 따라 봉건국가는 더욱더 많은 량의 세납을 금속화페로 수탈하였으며 지주들도 농민들을 화페지대를 통하여 착취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농민, 수공업자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과 농산물의 구입은 제외하고라도 봉건국가의 조세나 지주들의 지대를 물기 위하여서도 장마당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생산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것은 경제의 여러 부문들에서 상품생산의 장성을 가져오고 류통되는 상품량을 증대시켰다.
통일적인 금속화페의 류통은 또한 현물화페의 제한성을 극복할수 있게 함으로써 상품류통을 다그치고 그 발전을 자극하였다.
쌀이나 천과 같은 현물화페는 그가 가지고있는 화페로서의 제한성으로 하여 사람들의 교환활동에 적지 않은 불편을 주었다.
간편한 금속화페가 전국적으로 류통되게 됨으로써 현물화페를 통한 상품류통의 제한성은 현저히 극복되게 되였다.
통일적인 금속화페의 류통은 자본주의적경제관계의 발생발전을 촉진시켰다.
봉건통치배들은 엽전의 대량적인 주조과정을 통하여 근로인민들을 추가적으로 수탈하였다.
그들은 엽전주조때 금속의 품위가 낮고 무게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나쁜 돈을 만들어내여 강제로 류통시킴으로써 막대한 주조리득을 얻었다.
돌상차림이란 어린이의 첫 돌을 축하하는 상차림을 말한다.
전통적인 돌상에는 어린이가 자라면서 즐겨먹게 되는 백설기, 수수팥떡, 경단, 국수, 송편, 대추, 사과, 감, 배 등을 차려놓고 그앞에 무술, 학식, 재능을 상징하는 쌀, 실패, 먹, 붓, 책, 활 등을 놓았다.
음식은 성별에 관계없이 같았으나 앞에 놓는 물건은 달랐다.
총각아이돌상에는 훌륭한 무사가 되라는 뜻에서 칼이나 활과 화살, 작가가 되라는 뜻에서 책과 붓을 놓았다.
처녀아이돌상에는 알뜰한 바느질솜씨를 보여주라는 의미에서 실패, 자, 가위 등을 놓았다.
돌상차림풍습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이 앞으로 나라를 지키고 가정의 행복을 도모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것을 바라는 우리 인민들의 념원이 깃들어있는 우수한 풍습이다.
우리 인민은 오랜 력사적과정을 거치면서 민족적특성에 맞는 고상한 식사례절을 창조하고 계승발전시켜왔다.
녀성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 때면 의례히 머리수건을 쓰고 산뜻한 앞치마를 둘렀다.
우리 녀성들은 음식을 차릴 때에도 언제나 례절을 지켜왔다.
우선 음식을 담을 때 귀가 떨어지거나 허물이 있는 그릇에 담지 않도록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시부모님들을 모시는 며느리들은 밥이나 국, 반찬을 담을 때에도 웃어른들에게 드릴것부터 먼저 담았다.
또한 음식물을 문화성있게 그릇에 담는데도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밥은 뚜껑을 덮었을 때 눌리지 않을 정도로, 국은 사발가장자리에서 약간 내려가게 담았다.
이와 함께 나물, 생채와 같은 음식들은 접시에 소복하게 담고 전, 편육, 구이 등은 가지런히 눕히거나 보기좋게 돌려담았다.
우리 녀성들은 음식그릇들을 상에 놓을 때에도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편리하게 차려놓았다.
그리고 음식들을 담은 상을 나를 때에도 조용히 방안으로 들어와 가만히 내려놓았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이웃사이에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사는것을 례의로, 풍습으로 여겨왔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서로 나누어먹었으며 이웃집에서 결혼식을 할 때면 그 준비를 도와 밤새워 이불을 꾸며주고 옷도 지어주었으며 쌀, 옷감, 돈 등으로 성의껏 부조를 하고 축하해주었다.
또한 이웃에서 상사가 나면 고인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상제들을 위하여 함께 밤도 새워주고 관을 마련하고 묘를 만들어주는 등 상례를 성의껏 도와주었다.
이웃간에 서로 돕는 미풍은 겨울김장을 담글 때도 표현되였다.
배추를 절구고 씻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양념을 하고 독에 넣는것에 이르기까지 이웃들과 함께 하는것이 관습화되여있었으며 집에서 담근 김치와 양념을 이웃에 보내여 맛을 보이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또한 누가 집을 새로 짓거나 손질할 때는 온 동리가 떨쳐나서서 도와주었으며 집주인은 수고하는 이웃들에게 떡과 국수, 술 등을 차려 대접하는것을 응당한 도리로 여기였다.
이웃사이에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사는 풍습은 어려운 농사일을 함께 짓는데서 뚜렷이 표현되였다.
우리 인민은 밭갈이와 모내기를 비롯하여 김매기, 가을걷이에 이르는 농사일의 전반공정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소겨리와 품앗이, 황두와 같은 공동로력협조조직을 뭇고 농사일을 힘을 합쳐 해내는 아름다운 로동생활풍습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